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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김수용 감독 프로필 나이 키 유족 작품 사망 원인 이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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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김수용 감독 프로필 나이 키 유족 작품 사망 원인 이유

나의뮤 2023. 12. 3. 20:34

‘저 하늘에도 슬픔이’…한국 영화 이끈 김수용 감독 별세
- 2023. 12. 3

1960년대 한국 영화를 이끈 거장 김수용 감독이 3일 별세했다. 향년 94세입니다.

영화계에 따르면 김 감독은 이날 오전 1시 50분께 요양 중이던 서울대병원에서 노환으로 숨을 거뒀다.1929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난 고인은 학창 시절이던 1945년 해방 직후 3·1 운동에 관한 연극을 연출하는 등 일찍부터 극 예술에 재능을 보였다. 6·25 전쟁 때 통역장교로 복무했던 고인은 정전 이후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 배치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답니다.


데뷔작은 ‘공처가’(1958)다. 딸의 혼사를 앞두고 가정불화를 겪는 곰탕집 주인이 기발한 아이디어로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의 코미디물이다. 당시에도 군인 신분이었던 고인은 주말에 시간을 내 이 작품을 연출했다고 한다.

전역하고 본격적으로 영화에 뛰어든 그는 ‘벼락부자’(1961), ‘청춘교실’(1963), ‘내 아내가 최고야’(1963) 등 주로 코미디물을 내놓다가 ‘굴비’(1963), ‘혈맥’(1963), ‘갯마을’(1965), ‘안개’(1967), ‘만선’(1967), ‘토지’(1974), ‘산불’(1977), ‘화려한 외출’(1977), ‘만추’(1981) 등 영화를 잇달아 내놓으며 주목받았습니다.

1960년대 최고의 흥행작으로 꼽히는 고인의 작품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는 당시에도 대만 등으로 수출돼 해외에서도 인기를 누렸다. 극단적인 가난에 시달리는 소년 가장의 이야기를 담담한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신영균, 조미령, 황정순 등 당대 스타들이 총출동했다.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 고인은 다작으로 유명하다. 1999년 ‘침향’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 109편의 영화를 내놨다. 1967년 한 해에만 10편을 선보이기도 했다. 고인은 신상옥, 유현목 감독과 함께 1960년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습니다

영화계 원로 김수용 감독
- 2010. 10. 5.

프랑스 파리에 사는 배우 윤정희씨가 한국에 오면 꼭 찾는 사람이 있다. 바로 영화계 원로인 김수용(81) 감독이다. 김 감독의 서울 장충동 자택을 찾은 사람은 윤씨만이 아니다. 요즘은 많이 줄었지만 후배 감독과 배우, 기자들이 그의 집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신상옥, 유현목 감독 등과 함께 19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원로 영화감독 김수용. 1958년 '공처가'로 감독에 데뷔한 이래 모두109편을 연출했습니다.

"건물 안에 가족이 거주하는 공간과 함께 영화관련 연구소와 개인 영화박물관 등을 오픈할 생각입니다. 영화와 관련된 연구도 하고 싶고, 100여편에 이르는 제 영화도 정리해 전시하고 싶거든요."

건물은 현재 6층까지 올라간 상태이지만, 최근 수해로 공사가 지연되면서 올해 말 개관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답니다.

김 감독은 신상옥, 유현목 감독 등과 함께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를 이끌었다. 1958년 '공처가'로 감독에 데뷔한 이래 모두 109편을 연출했다. 김승옥의 소설을 영화화한 '야행'과 '안개', 김유정의 원작을 옮긴 '봄봄' 등 많은 문예영화를 만들어 '한국 문예영화의 대부'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집행위원장을 맡았다가 6개월 만에 사퇴한 충무로국제영화제만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아려온다. 충무로영화제는 지난 9월 정치적 갈등 속에서 예산이 크게 줄어드는 바람에 흥행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정치적인 문제를 우리 영화인이 해결할 순 없습니다. 앞으로는 영화인들이 맡아서 영화제를 제대로 키웠으면 좋겠어요."

사실 김 감독은 지난 6월 말 기자간담회를 갖는 등 의욕적으로 영화제를 준비했다. 하지만 서울시와 중구청, 여야 정당 간 정치적인 갈등으로 예산지원이 크게 줄면서 영화제를 제대로 꾸려갈 수 없었답니다.

―마음 고생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예산 40억원이 확보돼 있다고 해서 영화발전을 위해 집행위원장을 맡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어렵게 중구청으로부터 10억원을 지원받았지만 영화제를 진행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지요. 결국 조직위원회를 구조조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전 6개월치 임금을 먼저 반납하기도 했어요. 아무튼 안타깝습니다."

김 감독은 1929년 9월23일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응교리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일제 말 심상소학교를 다녔고, 다시 5년제인 안성국립농업학교에 입학해 공부했다. 이 시절 영화의 자양분이 된 문학책을 많이 읽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때 참 문학책을 많이 읽었어요. 일본어로 된 세계문학전집이었는데 모두 35권짜리였지요. 책 내용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어요. 이것이 나중에 영화 창작에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6·25전쟁을 통역장교로 보낸 그는 이후 서울 남산 국방부 영화촬영소에 근무하며 영화 촬영기술을 배웠다. 인생의 중대한 전환기였습니다.

"영화를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영화는 소설과 달리 카메라 광선을 알아야 합니다.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촬영 감독에게 렌즈를 다 정해줍니다. 기계적 기술에 밝았기에 질좋은 작품이 나온 것이죠. 저도 이때 영화를 기계적으로 마스터한 것입니다."

그는 1958년 영화 '공처가'로 감독에 데뷔했다. 당시 육군 대위였는데 계급장을 달고 휴일 밤 등을 이용해 촬영했다고 한다.

"군 복무 중 영화를 3편이나 찍었어요. '공처가', '3인의 신부', '구원결사대'가 그것이었죠. 그런데 나중에 문제가 돼 군법회의에 올라가게 됐습니다. 살살 빌다시피 해서 도망 나오듯 제대했어요(웃음)."

―영화에서 기계적 기술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요?

"(촬영)기계 등을 알아야 실제적으로 영화를 끌고 갈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심리상태 표현도 카메라가 도움을 주죠. 영화는 절반이 기계적 기술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카메라, 영상, 조명 등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이지요."

―요즘 영화는 촬영 기술이 어떤가요.

"요즘은 모두 잘하는 것 같습니다. 촬영기사에서 촬영감독으로 바뀌면서 작품 자체에 촬영 기술을 가지고 협조하죠. 의상, 조명, 녹음도 그렇고요. 과거에는 한 부문 기술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작품을 통해 종합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과거의 영화와 지금의 영화는 그래서 다릅니다."

김 감독은 얼마 동안 희곡영화, 코미디, 청춘영화 등을 찍었다. 주로 제작사가 주문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혈맥'에서부터 '갯마을', '안개', '산불' 등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예술성이 짙은 자신의 영화들을 찍기 시작했답니다.

―왜 문예영화를 찍기 시작한 겁니까.

"제작사가 주문한 영화들을 찍으면서 영화 감독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됐어요. 영화는 예술의 영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오락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탕에 예술이 깔려야 한다는 것을 눈뜨게 된 것이죠. 특히 한국에서 많은 독자들이 인정하는 소설에서 원작을 찾자고 생각해 문예영화를 찍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이광수의 '무정', 구효서의 '남의 남자의 여자' 등 한국 소설 40편을 영화로 만들었다. 액션만 빼고 거의 모든 유형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평가입니다.

김 감독은 평생 109편의 영화를 찍었는데 이는 111개를 연출한 것으로 알려진 고 고영남 감독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작고한 고 감독의 작품이 100편을 조금 넘는데, 만들다 중단한 것까지 포함돼 숫자가 정확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는 성실하게 영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예술적인 것을 바탕으로 하기보다 영화를 오락물로 봤죠. 저보다 먼저 영화를 그만뒀어요. 또 남기남 감독이 104편, 임권택 감독이 100편을 찍었고요."

―영화를 많이 찍었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영화를 찍던 1960∼70년대는 오락영화가 대다수였죠. 제작자 입장에서는 사람이 많이 찾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에게 영화를 맡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영화를 많이 찍었다는 것은 그만큼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고 할 수 있죠. 요즘은 평생 한두 편 찍고도 영화감독 또는 작가라고 하는 일이 있는 것 같지만요(웃음)."라고 전했습니다.

그는 한국 현대 영화의 한복판을 건너오며 많은 영화인들과 함께 울고 웃었다. 신상옥, 유현목 등 기라성 같은 감독들이 그와 시대를 함께했던 선배 또는 동료 감독이었답니다.

"신 감독은 영화를 인생의 첫 번째로 목표로 꼽을 만큼 사랑했어요. 누구보다 영화 기술의 완성도가 높았지요. 카메라를 직접 돌리기도 했지요. 술은 한 방울도 못 마시고요. 유 감독은 영화를 학구적으로 만듭니다. 상업 영화와는 거리가 멀죠. 흥행에 성공한 것은 많지 않습니다. 영화를 심리적으로, 예술적으로 굉장히 깊이 파고들어가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녀' 등을 만든 김기영 감독은 서울대 의대를 나온 의사 감독입니다. 사람이 쥐를 잡아먹는 장면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등 독특한 영화 세계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만희 감독은 어머니 다음으로 영화를 중요시한 사람입니다. 가족도 없어요. 영화를 잘 만들었던 것이죠."라고 전했습니다.

과거를 떠올리는 그의 목소리는 식지 않는 영화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힘이 넘쳤답니다. 2000년 '침향' 이후 10년간 작품이 없지만 그는 "내 머리는 아직 녹슬지 않았다"며 "투자자만 있으면 지금이라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며 웃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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